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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역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게 된다.

디자인인스 2016. 3. 22. 08:53

슈테른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험가인 발터 게를라흐(Walter Gerlach, 1899-1979)와 상의했다. 튀빙겐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한 게를라흐는 파셴의 조수로 있다가 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에 차출되어 무선 전신에 관한 일을 했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기업체의 물리학 실험실에서 일했다. 슈테른처럼 전쟁 중이던 1916년 하빌리타치온을 제출한 게를라흐는 1920년에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와서 강사가 되었다. 당시 보른이 이끌던 프랑크푸르트 물리학 연구소의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이론가들과 실험가들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모든 일을 함께 논의했다. 이러한 보른의 능력과 인품이 훗날 괴팅겐을 양자역학의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게 된다.



슈테른이 게를라흐에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상의하기 위해 찾아왔을 때 게를라흐는 비스무트 원자의 자성을 연구하기 위해서 불균일한 자기장을 가지고 실험하던 중이었다. 슈테른은 게를라흐에게 말했다.1)

"자기장 실험으로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공간 양자화라고 들어봤나?“
“아니, 난 하나도 몰라.”
“같이 해 볼까? 할 수 있을 거야!”

물론 바로 실험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슈테른은 먼저 대략적인 계산을 해보았다. 그래야 실험에 필요한 구체적인 수치를 얻을 수 있고 실험을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침 베를린 대학의 칼만(Hartmut Kallmann)과 라이케(Fritz Reiche)의 연구 결과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분자 빔을 이용해서 분자의 전기 쌍극자 모멘트를 측정했었다. 계산을 해 본 슈테른은 다시 게를라흐와 실험에 관해 논의했다.

“불균일한 자기장이 필요해. 불균일한 정도는 센티미터 당 1만 외르스테드2)는 되어야겠어. 그 정도 자기장을 만들 수 있을까?”
게를라흐는 자신에 차서 대답했다.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더 크게도 할 수 있지.”

마침 그는 비스무트 실험을 하면서 불균일한 자기장을 다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슈테른이 다시 말했다.

“그럼 이제 원자 빔을 만들어야 해. 폭은 10분의 1 밀리미터에서 100분의 1 밀리미터 정도여야 해. 그러면 할 수 있을 거야.”

실험이 금방 쉽게 실행될 리는 없었다. 당시에는 그들이 원하는 수준의 실험 장치를 구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그들의 실험에 필요한 장치는, 예를 들면, 강력하지만 불균일한 자기장을 만들어내는 자석, 10분의 1 밀리미터 크기의 충분히 센 원자 빔을 만들 수 있는 슬릿, 원자 빔이 지나가는 길에 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장치 등이었다. 또한 실험 과정에서 여러 기술적인 문제가 나타났다. 특히 진공 펌프와 냉각 장치가 많은 문제의 원인이었다.



당시는 충분한 양의 드라이아이스를 공급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한편 1차 세계대전의 뒤처리를 위한 베르사유 조약에서 독일에게 거대한 배상금이 부과되면서 촉발된 인플레이션이 1921년부터 독일 경제를 강타했다. 이는 역사상 가장 극심했던 초인플레이션으로 기록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슈테른과 게를라흐는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재원을 조달하고, 지원을 얻어내야 했다. 슈테른을 지도했던 아인슈타인은 그의 카이저-빌헬름 연구소를 통해 자금을 지원했고, 산업계의 인사를 소개해 주었다. 하르트만-브라운 사 (Hartmann und Braun AG)는 전자석을, 프랑크푸르트의 메세 사(MesserCo. GmbH)는 냉각장치에 들어갈 액체질소를 기부했다. 그 밖에도 그들의 개인적 친분과 대학을 통해 프랑크푸르트의 여러 기업과 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