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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의 작업 가능성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디자인인스 2016. 4. 1. 09:22

그러나 독일공작연맹이 독일인들에 의해서만 주도된 것은 아니었다. 산업화된 독일은 외국 건축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신세계였다. 아르 누보 운동이 독일에서 ‘유겐트슈틸(Jugendstil)’이라는 이름으로 수입될 때, 주요 건축가들도 함께 초빙되곤 했다. 벨기에 아르 누보를 대표했던 브뤼셀의 건축가 앙리 반 드 벨드(Henry van de Velde, 1863~1957)가 대표적이다.

반 드 벨드는 화가에서 디자이너 겸 건축가로 전향하며 완성한 첫 작품이자 자신의 신혼집인 블뢰멘베르프(Bloemenwerf, 1895)를 통해 국제적 명성을 쌓았다. 독일에서 중요한 디자인 의뢰를 받은 반 드 벨드는 그곳에서의 작업 가능성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결국 반 드 벨드는 가정을 위한 이상적 공간으로 계획된 블뢰멘베르프의 삶을 과감히 접고 독일로의 이주를 결정한다. 그리고 1899년 괴테와 니체의 도시인 바이마르(Weimar)에 정착한다. 여전히 벨기에 국적의 외국인이었지만, 정착 초기에 독일에서 다양한 작품 기회들을 제공받았고, 본격적인 건축가로서의 경력을 쌓을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았다.



바이마르가 반 드 벨드를 선택했다면, 같은 해인 1899년 산업 도시 다름슈타트(Darmstadt)는 오스트리아의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Joseph Maria Olbrich, 1867~1908)를 맞이한다. 아르 누보와 흡사한 오스트리아의 예술 운동으로서, 1897년에 창설된 ‘비엔나 제체시온(Wiener Secession)’의 대표 건축가였던 올브리히도 유겐트슈틸의 도시로 탈바꿈하려는 다름슈타트의 개조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리더였다.



반 드 벨드와 올브리히 같은 이방인 건축가들이 20세기를 맞이한 독일 건축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았다. 두 건축가 모두 1907년 독일공작연맹이 창설될 당시 주요 구성원이기도 했다. 당시 독일은 보편적 예술의 가치를 추구하는 다국적 아방가르드(avant-garde)들의 실험정신과 창의적 도전을 장려하는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적 신세계였다. 이러한 독일의 문화적 분위기는 이후 젊고 유능한 독일 출신 근대 건축가들을 많이 배출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다만 국제 정세의 변화와 함께 독일 내의 분위기 또한 달라지기 시작했다. 제국주의가 팽창하면서 국가적 경쟁과 마찰이 과열되었고, 민족주의와 국수주의가 강성해지자 이방인 건축가들의 상황은 전과 같지 않게 되었다. 특히 비 게르만 문화권 출신인 반 드 벨드는 그런 상황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공작연맹 내부에서도 미묘한 균열이 생겨나게 된다. 의사 결정에 있어 외국 출신의 발언권은 약화되고, 심지어 배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독일공작연맹은 1914년에 개최될 중요한 행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